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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국(忠國)과 위민(爲民)의 표상, 김방경의 ‘살신성인’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1-01-29 (금) 15:19

문무(文武)와 용기·덕 겸비한 탁월한 장수이자 외교관 신상필벌 공평무사 강직·대범·책임감으로 위기 돌파




우리 역사에서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장군만큼 간난신고(艱難辛苦)와 파란만장의 시대를 굳센 의지와 책임감으로 오뚝이처럼 버텨 내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 든 것을 바친 위인은 흔치 않다. 고 려 중후기 몽골의 침략과 간섭으로 조국이 백척간두에 처한 전쟁과 격 변의 소용돌이 속을 온몸으로 관통한 김방경 장 군은 어떤 인물인가. 두 차례나 일본 본토 정벌에 나선 한민족 유일 의 대장군이자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도 탐 낸 명장이다. 국가 수호와 개인적 의리의 갈등 속에서 옛 전우인 삼별초 토벌에 나서는 악역을 감당해야 했고, 몽골제국의 압제를 피해 가면서 고려 왕실과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 앞에 오롯이 자신을 던졌다. 타고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어려서부 터 강직하고 옳지 못한 일에 나선 적 없었으 며, 희대의 매국 부원배(附元輩) 홍다구(洪茶丘, 1244~1291)에게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기 개와 충절의 참군인이었다. 숱한 역경과 선택의 순간마다 깊이 고뇌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위대한 거인이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백 성을 위해 ‘역사의 독배(毒杯)’를 든 김방경의 리 더십은 현실과 역사 앞에서 자신을 버리는 투철한 책임감과 사명의식 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방경은 원 (元)의 침공과 간섭이 시작돼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기간에 생존했던 인 물이다. 특히 그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군을 지휘했던 ‘글로벌 제너럴 (Global General)’이었다. 그의 본관은 안동. 선(先, 또는 舊)안동김씨로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 (後, 또는 新)안동김씨와 구별된다.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 으로 할아버지는 민성(敏成)이며 아버지는 병부 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김방경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강직해 한 번 뜻을 품으면 잘 굽히지 않았다. 이런 강직한 성품으로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때 당시 권신 유천우와 대립하기도 했고, 상장군이 돼서도 반주(班主) 전분( )의 미움을 사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감찰어 사로 재물을 관리하는 우창(右倉)을 감독할 때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재상의 청탁도 일언지하 에 거절했다. 그가 태어났던 1212년은 ‘최씨 무신정권 60년’ 의 2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였다. 김방경은 18세인 1229년(고종 16)에 음서(蔭敍)를 통 해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1230년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자 이듬 해 최우는 강화(江華)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김방경은 강화도에 들어가지 않고 몽 골군과 싸웠다. 당시 강화도의 생활은 편안했으 나, 육지에선 몽골군에게 20만 명 이상의 포로가 끌려가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몽골군의 내습 시 기는 주로 가을이어서 추수기에 농민들의 수확 물을 약탈당했으며 흉년까지 겹치기도 해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
 
이에 김방경은 강화로 가는 대신 백성들과 함 께 육지에서 항전을 택했다. 그가 1248년 서북 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목민 관으로서 충국과 위민 사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방경은 몽골의 침략을 피해 백 성들과 함께 위도(葦島·평북 정주)로 들어갔다. 김방경은 이곳에서 바다의 조수를 막기 위해 제 방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어 백성들이 농사를 짓 게 했다. 또 부족한 물을 구하기 위해 못을 만들 어 비를 받아 저장해 백성들의 생활에 크게 도 움을 줬다. 김방경의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할 내용은 무 장(武將)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고려는 1258년 김준 등에 의해 60년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임연이 실권을 잡았다. 이때 국왕과 무신정 권 사이에 개경 환도(還都)를 놓고 대립했다. 국 왕 원종은 환도를 원했으나, 임연은 이를 거부하 고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昌)을 옹립했다. 그러나 원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에 고려는 이장용과 김방경을 원과의 군사 적 충돌을 막기 위한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했 다. 김방경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원나 라의 관리를 수없이 설득하고 머리를 숙였다. 1263년 원나라의 침공이 뜸해지자 김방경은 상 장군으로 진도와 남해안 일대를 침공한 왜구를 격파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 유천우의 미움을 사 남경유수로 좌천당한다.

마침내 1270년 6월에 개경 환도가 이뤄졌다. 이때 무신정권의 조아(爪牙)였던 삼별초는 환도 를 거부하고 난(亂)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배중손 이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삼아 진도(珍島)를 거 점으로 한반도의 서남해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김방경 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했다. 원나라 장수 아 해(阿海)가 삼별초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퇴하려 는 것을 김방경이 저지하면서 결국 삼별초 토벌 에 성공했다.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전사하자 삼 별초의 남은 세력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탐라(제 주도)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다. 김방경은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시중(侍中, 수상직)에 올랐다. 김방경의 무장으로서의 면모는 2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원의 세조는 삼별초를 토벌한 이듬해인 1274년(충렬왕 즉위 년) 고려에 일본 정벌의 준비를 강요했다. 이때 김방경은 도독사(都督使)로서 원의 도원수 홀돈 (忽敦, 쿠돈)과 함께 고려에서 제작한 선박 900 척과 고려군 8천 명 등이 포함된 4만여 명의 여 몽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원정군은 쓰시마 섬(對馬島)과 이키(壹岐)섬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 렸다. 그리고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후쿠오 카)지역에 상륙해 소하라(蘇原)의 지휘소를 점령 하는 등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 원나라군 사령관 홀돈은 “우리 원나라가 전 투를 잘한다고 하지만 고려군의 활약보다 어찌 뛰어나다고 하겠는가”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하 지만 운은 일본의 편이었다. 김방경은 상륙 후 진격을 주장했지만 홀돈은 배에 머물면서 지구 전을 준비했다. 김방경은 선박으로 돌아가자는 원 장수들을 만류하면서 마지막 총공세를 준비 하기 위해 잔류할 것을 권했으나 결국 연합군은 선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폭풍으로 거의 모든 선박이 파손되고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남긴 채 원정군은 퇴각했다. 김방경은 이 전쟁에서 탁월한 용병을 통해 자 신이 지휘하는 전투를 능동적으로 주도했다. 어 려울수록 위축되지 않고 더욱 용기를 내며, 승기 를 잡으면 고삐를 놓치지 않고 죄였던 과감성이 위기관리의 요체였다. 일흔 살의 김방경은 1281 년의 제2차 일본정벌에도 노구를 이끌고 참여했 다. 이 원정은 군사 14만여 명이 동원된 규모상으 로 볼 때 세계사에서 일찍이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규모 해상원정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이 만한 규모의 상륙작전은 없었다. 2차 여몽연합군 병력 중 군사 10만여 명은 남 송(南宋)에서 차출됐다. 연합군은 이키섬에서 만 나 공격을 하고자 했으나 남송군(강남군)의 출격 이 지연돼 장소를 히라도(平戶)로 바꿔 다카시마 (鷹島) 일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군이 공격을 준비하던 중 폭풍이 불어 닥쳐 연합군은 변변한 공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참상 을 ‘고려사’는 ‘시체가 조수를 따라 포구에 들어 와 포구가 이로 말미암아 막혀서 시체를 밟고 다 니게 됐다’라고 전한다. 두 차례나 태풍이 보호하여 일본을 살려낸 셈 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가미카제(神風·신풍)’. 천우신조라는 얘기다. 일본의 역사가 바뀔 뻔했 던 이 원정의 지휘관인 김방경 장군을 주인공으 로 한 일본의 소설이 있다. 1960년대 초 일본 작 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1907~1991)가 쓴 ‘風濤(풍도)’가 그것이다. 김방경은 일본 원정을 통해 고려와 원에서 가 장 신뢰받는 인물이 됐다. 2차 원정 때 보여주었 던 용장으로서의 면모에 대해 ‘고려사’ 김방경 열전(列傳)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남송군이 도착하지 않자 환국하자는 논 의가 분분하던 때였다. “왕의 지시로 3개월분의 식량을 가지고 왔으니 아직도 1개월분의 남아 있다. 남송군이 와서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할 수 있다고 하니 감히 더 이상 말하는 장수가 없 었다.”

김방경은 반듯한 성품으로 무고와 모함 등 많 은 시련과 고초를 겪기도 했다. 1277년, 원나라 홍다구의 사주를 받은 위득유(韋得儒) 등의 모함 으로 김방경은 또다시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유배됐다. 부정을 저지른 위득유 측근의 비위를 눈감아 달라는 청탁을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것이다. 김방경이 왕과 왕실, 원의 관리 다 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인 후 강화에서 반란을 꾀 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원나라 신문관(訊問官)을 자청한 악질 부원배 (附元輩) 홍다구의 고문은 잔인했다. 홍다구는 아 버지뻘(32세 연장)인 김방경에게 한겨울에 심한 매질은 물론, 머리와 목에 철쇄를 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보다 못한 충렬왕은 “장군, 원나 라의 황제가 현명해 장차 그 억울함이 밝혀질 것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이는가. 차라리 거짓이라도 자백을 하여 그 지독한 고문에서 벗 어나라”고 했지만 김방경은 “전하, 신이 어찌 감 히 몸을 아낀다고 거짓자백을 하여 군주에게 누 가 되고 사직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하고 고문을 견뎌냈다. 이 사건은 쿠빌라이의 친 국(親鞫)으로까지 비화했다. 그 과정에서 김방경 의 역모죄는 세조에게 보낸 충렬왕의 상소로 무 죄임이 밝혀졌다. 김방경으로서는 몇 번에 걸친 모함이 무척 억울했지만 그는 이 또한 고려의 대 신과 장수로서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곧은 성격은 고려와 원나라 양쪽으로 부터 신임을 받게 되는 근거도 됐다.

김방경은 가장 믿을 만한 고려 사신이었다.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73년 가을, 삼별 초를 토벌한 뒤 김방경은 원나라로 가서 원 세조 (世祖·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았다. 1281년 김방 경은 70세 고희가 되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충렬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2차 일본 원 정의 중책을 맡겼다. 원의 세조도 직접 김방경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할 정도였다. 그의 우직한 충정심과 공평무사한 처신을 높이 산 것이다. 72세이던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 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 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 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 해졌다. 김방경은 1212년(강종 1) 태어나 1300 년(충렬왕 26)에 사망했으니 향년 89세였다. 김방경은 직언을 하는 곧은 성품의 관리이자 나라의 명에 자신을 바쳤던 충국의 귀감이며 애 민사상을 실천한 목민관이었다. 특히 원나라의 사신으로, 목숨을 내건 일본원정의 전장에 서슴 지 않고 나서 국가에 충성하고 뜨겁게 백성을 사 랑했던 글로벌 고려인이었다. 김방경의 일생은 산전수전을 겪은 평생 군인 의 길이었다. 오늘날에도 70세에 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드물다. 71세에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정도나 이에 해당할 것이 다. 김방경이 활동했던 800년 전에는 70세의 수 를 누리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숱한 전역(戰役)을 치르면서도 김방경은 89세까지 장수를 누 렸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 정말 대전역(大戰役)이 었다. 대몽항쟁, 삼별초 토벌, 제1, 2차 일본원정 등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험한 바다(風濤)를 여러 차례 건너 싸워야 하는 대규모 해상원정까지 미 증유의 전장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웠고 천운으 로 살아남았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자. “김방경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평생 임금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비 록 벼슬자리에 물러나 한가히 있을 때도 나라 근 심하기를 집안일과 같이했고 큰 논의가 있으면 임 금이 반드시 자문했다.” 김방경은 군인으로서 확 고한 신상필벌과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킨 지휘관 이었다. 단 한 번도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았고 자 신의 이익을 조직과 나라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지 않았다. 대학자 익재 이제현의 아버지인 검교시중 (檢校侍中) 이진은 김방경을 이렇게 평가했다.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 세 가지 가 있다. 덕(德), 수(壽), 작(爵)이다. 김방경은 어 려움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덕, 89세까지 산 수(壽), 상국도원수로서 공(公)에 봉 해진 작(爵), 셋을 고루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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