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이순신, 백전불패의 영웅 얀 지슈카 리더십
기자 : 관리자 날짜 : 2022-04-22 (금) 11:42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異端) 으로 낙인찍힌 보헤미아(체코)의 성직자 얀 후스(Jan Hus)가 화형당한다. 후스의 사제복은 모두 벗겨졌으며, 머리 위에는 ‘이단의 괴수(heresiacha)’라는 글자가 적힌 모자가 씌워졌다. 불길이 그를 삼켰고, 이 불길은 이른바 ‘후스전쟁’ 의 불씨가 됐다. 얀 후스는 교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재산권을 부정했다. 지방영주들과 세속의 왕들에게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하라고 주장했다.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 의 계급제도를 부정했다. 교황과 공의회가 내리는 교령(敎令)은 세속의 권위 일 뿐, 신앙적인 권위를 갖지 못한다. 기독교도들은 성서의 복음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가르쳤다. 평신도 들도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사제들은 자기네들만 아는 라틴어로 된 성 서를 읽으며 라틴어로 강론했다. 후스는 체코어로 번 역된 성서를 보급해 평신도들에게도 성서를 손에 쥐 어주었다. 성찬식(聖餐式) 때 후스는 평신도들에게도 포도주를 허락했다. 또 면죄부(免罪符)가 교황의 탐욕 과 가톨릭의 부패를 상징한다고 강경하게 비판했다. 후스의 사상은 일반 평신도였던 농민, 상인 등 낮 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지지와 호응을 불러일으켰 고, 교회 성직자들이 설치는 꼴을 보기 싫었던 보헤 미아의 소귀족들도 동조했다. 이에 크게 당황한 교회는 그에게 이단혐의를 씌워 불태워 죽였다. 이 화형(火刑)소식에 체코의 후스파 신도들은 격분 했고, 곧 폭동으로 이어졌다. 1415년 후스파 귀족들이 콘스탄츠 결의문을 정면 으로 거부하자 체코 각지의 후스파 농민들과 백성들 이 봉기했다.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포도주를 허락한 후스의 가르 침을 따라 포도주를 담은 성배(聖杯)를 자신들의 상징으 로 삼았다. 1419년 프라하에서 강경 후스파들이 시의 회 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투척해 살해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그스문트(Sigismund)는 체코 인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휘하 영주들과 기사 들을 소집해 곧장 진압에 나섰고, 소식을 들은 로마교 황청 또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교황 마르티노 5 세와 황제는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가톨릭국가 들에게 십자군(十字軍)소집령을 내렸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보헤미아를 대상으로, 같은 기독교도인 체코 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멸하기 위해 유럽 각지 에서 십자군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교황이 십자군소집령을 내렸다는 소식은 잠자코 있던 소극적 후스파들도 들끓게 만들었다. 각지의 농민들이 농기구와 변변찮은 무기를 들고 집을 나섰고, 급진적인 후스파 사제들은 평신도들에 게 무기를 들고 일어나라 호소했다. 교황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의용군은 삽시간에 불어났고, 그 지 휘관 중 하나가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던 얀 지슈카(1376~1424)였다. 얀 지슈카는 보헤미아의 몰락 귀족 출신으로 유럽 각지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으며,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독일 튜튼기사단이 맞붙은 그룬 발드 전투에서 폴란드 연합의 용병으로 참전해 튜튼 기사단을 격파한 전적이 있는 노련하고 전략적인 용 맹한 군인이었다. 한쪽 눈을 전쟁터에서 잃었기에 그를 가리켜 ‘외 눈박이(척안·隻眼) 지슈카’라고 불렀고, 애꾸눈 안대 와 철퇴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의 군사고문 시절, 프라 하에서 활동하던 얀 후스의 사상에 심취된 지슈카는 후스의 열렬 신봉자가 된다. 1415년, 지기스문트의 간계(奸計)에 속아 얀 후스 가 화형당하자 격렬하게 반발했고,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으로 사실상 독일제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지 자 강경 후스파신도들을 이끌고 봉기하고, 1420년 보헤미아 남부 산악지대 타보르 요새에서 십자군 기 사들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과 후스파 신도 들을 모아 타보르동맹군을 결성, 본격적으로 ‘후스 전쟁(1419~1436)‘에 뛰어든다. 지슈카는 용병시절 경험과 그룬발드 전투(1410. 6. 15.)의 승리로 기사의 전투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 갑옷의 방어력은 최절정에 달해 있었고, 완 전무장한 기사들이 기마돌격을 개시하면 훈련받지 못한 보병대는 결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모 여든 타보르군은 대다수가 농민병들이어서 평지에서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산이 없었다. 노련한 용병은 아군과 적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비 책을 마련했다. 지슈카는 후스파 농민병들이 전의(戰意)만은 높다 는데 주목했다. 비록 훈련도는 낮았지만 신앙을 지 키고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기 에 전의 만큼은 왕의 병사들을 압도했다.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전의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지슈카는 군대의 규율을 정했다. 깃발과 나팔을 신호로 지휘자의 명령에 일사불란 하게 움직이도록 훈련시켰고, 전진과 후퇴, 부대의 이동과 공격개시의 명령을 휘하부대에 철저하게 훈 련시켰다. 이러한 훈련은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겄이었으며, 지슈카의 군사학은 전근대적인 당시의 군사전략과 는 궤(軌)를 달리하고 있었다. 농민병들을 굳이 익숙하지 않은 칼과 창으로 무장 시키기 보다는 평소 쓰던 도리깨를 전투용으로 강화 해 무장하게 했다. 또한 기사들과 평지의 야전에서 정 면으로 맞붙을 경우, 승산이 없음을 잘 알았기에 ’수레 진(Wagenberg)’이라는 독창적인 전술을 도입했다. 이것은 농업용 마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해 철판을 덧대어 방어력을 보강한 뒤 여러 대의 수레를 잇대 어 붙임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요새를 즉석에서 만드 는 전술이었다. 수레의 구조를 보면, 수레에는 총안(銃眼)을 내어 총포와 석궁을 발사할 수 있게 개조했고, 수레의 바 깥쪽에 내릴 수 있는 문을 내어 유사시 전술적인 기 동을 용이하게 했다. 마차로 아군 보병들을 보호하는 한편 적 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싸우도록 유도했다. 이 수레들은 각각의 모서리를 연결해 결속력을 공 고히 했고, 보강된 방어력과 결속력으로 수레진은 문자그대로 요새나 다름없었다.

각 수레진의 병사들은 16~20명으로 석궁병 4~8 명, 총병 2명, 파이크병 또는 도리깨로 무장한 농민 병 6~8명으로 구성됐다. 지슈카는 발전하고 있는 화포와 총기의 성능을 높 이 평가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원시적인 성능의 소형 총이었지만, 특별한 훈련없 이 농민도 손쉽게 쏠 수 있었고, 기존의 총병들이 평 지에서 한 두발 쏘고 기사들의 육박전에 와해되는 문제점을 ‘수레진전술’로 보완했다. 전략과 전술은 완성됐다. 이제는 적을 섬멸할 차 례였다. 행군하던 타보르군을 발견한 십자군 기사 2,000 명이 공격을 감행해왔다. 상대가 농민병에 도리깨를 들고 심지어 아이와 여자까지 있는 걸 보고 십자군 은 코웃음을 쳤다. “볼 것도 없는 잔챙이들이다.” 특이하게도 수레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 꼴이 군대가 아니라 상인행렬같 아 보였다. 돌격나팔이 울리고 기사들이 일제히 돌 격했다. 지슈카는 침착하게 나팔과 깃발을 신호로 병사들 을 통제했다. 전투수레 12대로 원형방진(圓形方陣)을 짠 방어진 은 하나의 요새와도 같았다. 지축을 흔드는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에 질린 병사 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기병의 위압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말발굽 소리, 기병들의 함성소리, 번뜩이는 장검과 갑옷, 차츰차츰 가까워져 오는 위압적인 크기. 석궁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였고, 총을 겨눈 손 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옆의 동료가 긴장하며 침 을 삼키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얀 지슈카는 병사 들을 다독였다. “겁 먹지 마라. 내 신호를 기다려라!” 적병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투구를 쓰 지 않은 기사의 눈동자가 똑똑히 보일 때, 얀 지슈카 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쏴라!” 숨죽이고 있던 대포와 총, 석궁들이 일제 히 발사됐다. 기사의 몸뚱이와 말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지나갔 다. 지근거리에서 발사되는 석궁과 총탄은 기사의 갑옷도 능히 뚫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기가 죽어 나자빠졌지만 기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랜스(lance, 기병들이 썼던 창)가 수레를 강타했지만 철판을 덧대어 보강한 전 투용 수레는 그 정도로는 꿈쩍도 않았다. 당황한 기 사가 우물쭈물할 때 수레 위의 농민병들이 내려다보 며 창과 도리깨를 강타했다. ‘수레진전술’은 평지 돌 격전에만 익숙해져 있던 기사들을 난데없는 공성전 (攻城戰) 상황으로 끌어들였다. 순식간에 수레진 앞에는 기사들과 말의 시체들로 가득 쌓였고, 예봉(銳鋒)이 꺾인 기사들은 일단 공격 을 멈추고 물러나서 재정비를 시도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적병을 살피던 지슈카의 눈 이 번득였다. 바로 이때를 기다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수레가 이동하고 통로가 생겼 다. 그 틈으로 그동안 수레진 안에서 팔팔하게 쉬고 있던 기병들과 대기하고 있던 농민병들이 일제히 쏟 아져 나갔다. 놀란 기사들이 황급히 전열을 갖추려 해봤지만 후방 에서 밀려드는 농민병들에게 하나둘씩 쓰러져 나갔다. 갈고리로 말에서 끌어내리고 도리깨로 후려치면 제아 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은 기사라 한들 도리가 없었다. 영지(領地)에서 말을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무시하 던 그 농민들에게 고귀한 기사들이 진흙뻘밭에서 목 숨을 구걸하며 죽어갔다. 얀 지슈카는 공성전에만 쓰이던 대포를 최초로 야 전(野戰)에서 끌어다 썼다. 200년이 지난 17세기 스 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이동 포대’를 도입함으로써 지슈카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다. 지슈카는 보병, 기병, 포병을 하나의 전술단위로 취급한 최초의 지휘관으로도 유명하다. 평지에서 보병들을 유린하던 전투밖에 모르던 기 사들은 수레로 보호되는 방어벽 위에서 쏟아지는 막 강 대포의 화력에 혼비백산했다. 이런 양상으로 얀 지슈카는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수도머와 네크미르 전투에서 각각 2,000명의 기사 들을 제물로 삼았다. 1420년 6월 12일, 지그시문트 황제의 대병력에 포 위된 프라하가 도움을 청해왔고, 지슈카는 즉시 구원 에 나선다. 도시 외곽 비트코프 언덕에 진을 친 지슈 카는 목재로 된 요새를 돌과 진흙벽으로 보강했다. 십자군 기사들이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지슈카의 타 보르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십자군의 공세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을 때, 후스파의 별동부대가 포도원을 가로질러 십자군의 측면을 쳤고, 격렬한 공격에 요 새의 북쪽 절벽 아래로 몰린 십자군은 비명을 지르며 와해된다. 300명의 기사가 죽었고, 황제는 프라하 공 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슈카는 언제나 승리했다. 황제의 추종자들과 가 톨릭파는 계속해서 덤벼들었으나 천재적인 군사전략 가인 지슈카는 열세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승리를 이 끌어냈다. 극단적인 방어전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수레진에만 집착하지 않았고, 과감한 기동(機動)을 해 야할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연못과 언덕 등 지형지 물을 이용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황제와 그 적들은 단 한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얀 지슈카의 주요 전투와 활약상을 훒어보면, 1419년 5월 23일 타보르에서 타보르동맹군군을 결 성한 다음 그해 12월 네크미르 전투에서 가톨릭파 2,000 기병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1420년 3월 25일 수도머 전투에서 역시 가톨릭파 2,000 기병을 물리 쳤다. 이어 6월 12일 프라하공방전 비트코프 힐 전 투에서 황제의 10만 포위군을 격퇴했고, 11월 1일 비셰흐라드 전투에서 1만8,000 가톨릭군을 무찔렀 다. 12월 1일 쿠트나호라 전투에선 가톨릭파 5만명 의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이후 후스파가 분열해 내전에 휩싸이고 지슈카는 부상으로 남은 한쪽 눈마저 잃고 완전한 맹인이 되 지만 계속해서 싸움에 임했다. 그 왕성한 전투정신과 지칠줄 모르는 용기는 그 적들로부터 찬탄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지슈카를 가 리켜 “인간은 결코 죽일 수 없는 존재, 신만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라며 두려워했다. 지슈카는 1424년 10월 11일, 모라비아 공략전에 서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타보르군은 스스로를 ‘고 아’라 칭하며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이후 후스파는 내전을 거쳐 온건파가 승리하는 등 진통을 거치면서 결국 가톨릭과 화의를 맺고 1436년 이그라 우 협정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먹는 후스파의 의식 을 허락받으며 전쟁을 끝낸다. 현재 체코 국민들은 프라하와 그의 군사적 발상지 가 되었던 남부 산악지대 타보르(체코어로 진지·陣地, 해발 437m)의 지슈카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19세기 체코 민족음악의 창시자인 작곡가 스메타나(1824~1884)의 교향시 ‘나의 조국’은 후스전쟁 당시 타보르동맹군 지휘관 지슈카 등 후스파가 건설해 이들의 중심지가 된 타 보르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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